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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2026-06-22

AI 시대, 디자이너의 역할은 어디로 향하는가

생성형 AI · 디자인의 미래 · 디자인 전략 · 문제 정의 · 디자이너의 역할 고성욱 (CE본부 VX팀 책임 디자이너)

모두가 잘 만드는 시대, 디자인의 경쟁력은 어디서 오는가

생성형 AI가 등장한 이후 디자인 업계에는 흥미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는 하나의 아이디어를 시각화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다. 레퍼런스를 수집하고, 여러 방향을 탐색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결과물에 도달하는 과정은 디자이너의 중요한 역량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이미지를 만들고, 시안을 탐색하고, 아이디어를 시각화하는 과정은 이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좋은 결과물을 만드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생성형 AI는 결과물 생산의 장벽을 빠르게 낮추고 있다. 이 변화는 분명 긍정적이다. 더 많은 아이디어가 구현될 수 있게 되었고, 더 다양한 시도가 가능해졌다. 과거에는 시작조차 어려웠던 일들이 이제는 훨씬 낮은 비용과 시간으로 실현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 다음부터다. 좋은 결과물을 만드는 일이 쉬워질수록, 오히려 디자인 업계는 새로운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만약 모두가 더 잘 만들 수 있게 된다면, 앞으로 디자인의 경쟁력은 어디에서 만들어질까..


결과물을 만드는 능력은 더 이상 희소하지 않다.

오랫동안 디자인 업계에서 경쟁력은 결과물을 만드는 능력에서 나왔다. 더 완성도 높은 화면을 설계할 수 있는가. 더 세련된 비주얼을 구현할 수 있는가. 더 빠르게 아이디어를 시각화 할 수 있는가. 이러한 역량은 분명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왔다. 실제로 과거에는 좋은 결과물을 만드는 사람 자체가 많지 않았다. 표현력과 제작 능력은 높은 진입장벽이었고, 그 자체로 경쟁력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좋은 디자이너는 곧 좋은 결과물을 만드는 사람으로 설명되곤 했다. 하지만 생성형 AI가 등장한 이후 상황은 조금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하나의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다양한 레퍼런스를 찾고, 여러 방향의 시안을 제작하며, 그중 일부를 발전시키는 과정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좋은 결과물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도구를 다룰 줄 아는 것을 넘어 경험과 숙련도를 의미했다. 반면 지금은 다르다.

 생성형 AI는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가능성을 제안하고, 아이디어를 빠르게 시각화하며, 탐색의 범위를 이전보다 훨씬 넓혀주고 있다. 과거에는 하루가 걸렸던 작업이 몇 분 안에 가능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결과 좋은 결과물은 과거보다 훨씬 많아졌다. 얼핏 보면 디자인 업계가 오랫동안 바라왔던 변화처럼 보인다.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게 되었고, 좋은 결과물에 접근하는 문턱 역시 낮아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또 다른 현상이 나타난다. 좋은 결과물은 많아졌는데, 차별화는 오히려 더 어려워지고 있다.

 예전에는 결과물의 품질 자체가 차이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비슷한 도구를 사용하고, 비슷한 레퍼런스를 참고하며, 비슷한 수준의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다. 결과물의 평균 수준은 높아졌지만, 그것만으로 강한 차이를 만들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경쟁력은 다른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경쟁력은 언제나 희소한 곳에서 만들어진다

경쟁력은 희소성과 함께 움직인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경쟁력이 되기 어렵고, 쉽게 대체되지 않는 일은 자연스럽게 경쟁력이 된다. 돌이켜보면 디자인 업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때는 결과물을 만드는 능력 자체가 희소했다. 그래서 더 잘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물 생산의 장벽이 낮아질수록 그 전제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사라지는가가 아니다. 무엇이 희소하게 남는가다.

 기술의 발전은 늘 이런 방식으로 경쟁력의 위치를 바꾸어 왔다. 어떤 능력이 보편화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다음 단계의 가치를 찾기 시작한다. 지금 디자인 업계가 마주한 변화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생성형 AI는 디자이너의 경쟁력을 없애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쟁력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위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디자인에서 희소하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결과물을 만드는 능력 그 자체라기보다,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판단하는 능력에 더 가까울 것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 무엇을 중요하게 바라봐야 하는가.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어떤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가. 결과물을 만드는 일은 점점 쉬워지고 있지만, 이러한 판단은 여전히 쉽게 대체되기 어렵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디자인의 차이는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결과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

같은 도구를 사용해도 어떤 프로젝트는 사람들에게 선택받고, 어떤 프로젝트는 그렇지 못하다.

같은 수준의 완성도를 가진 서비스라도 어떤 경험은 기억에 남고, 어떤 경험은 쉽게 잊힌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발생할까. 디자인 프로젝트는 화면을 만드는 순간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가.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가. 어떤 경험을 만들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이 먼저 존재하고, 결과물은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만들어진다. 결국 우리가 보는 결과물은 단순한 디자인의 시작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루어진 문제 정의와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다.

 실제 프로젝트를 돌아보면 더 큰 어려움은 디자인 툴을 다루는 과정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명확하지 않거나, 사용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프로젝트의 방향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을 때 더 큰 어려움이 발생한다. 결국 디자인은 무언가를 보기 좋게 만드는 일만이 아니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 왜 만들어야 하는가. 누구를 위해 만들어야 하는가. 디자인은 결국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가깝다. 그래서 같은 수준의 결과물을 만들어도 전혀 다른 성과가 나타난다.

 차이는 종종 표현력보다 판단력에서 발생한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보다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 무엇을 추가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덜어낼 것인가. 무엇을 우선순위에 둘 것인가. 이러한 선택들이 결국 경험의 질을 결정한다. 결과물을 만드는 능력이 평준화될수록, 그 이전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판단과 선택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모두가 만들 수 있게 된 이후

결과물을 만드는 능력이 경쟁력이던 시대에는 더 잘 만드는 사람이 앞서갔다. 하지만 모두가 만들 수 있게 된 이후에는 어떤 문제를 발견했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바라보는지,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더 큰 차이를 만들고 있다. 어쩌면 생성형 AI는 디자인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경쟁력이 원래 존재하던 위치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에 가려져 있던 판단과 선택의 중요성이 이제는 더욱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생성형 AI는 디자이너를 덜 중요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반대일 수도 있다. 우리가 그동안 디자인의 경쟁력이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는지를 다시 보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디자인을 결과물로 이해해왔다. 하지만 결과물을 만드는 능력이 점점 보편화될수록, 디자인의 가치는 결과물 자체보다 그 이전에 이루어지는 판단과 선택 속에서 드러나기 시작한다.

무엇을 해결할 것인가. 무엇을 중요하게 바라볼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만들지 않기로 결정할 것인가. 결국 생성형 AI가 바꾸고 있는 것은 디자이너의 필요성이 아니라, 디자이너의 역할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역할이 다시 정의되는 과정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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